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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 김민수
  • 승인 2010.03.2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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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칼럼니스트     © 한강타임즈
안중근(安重根)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대한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아버지가 죽어 돌아왔다. 1906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으며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으며 7월 고조 광무제의 강제퇴위와 정미늑약의 늑결, 군대해산에 따라 정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대한독립운동을 하였다.
안중근은 대한독립군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고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대한독립군 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군을 모았으며 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으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했다. 1908년 6월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안중근은 대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 장소로 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으로 갔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군중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국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러시아 검찰관의 조사과정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이토가 대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총살하였다고 거사 동기를 밝혔다. 일본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고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 대한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 검찰에게 1895년 대한제국 명성황후 살해, 1905년 11월 을사늑약 늑결, 1907년 7월 정미늑약 늑결, 동양평화 교란 등 이토의 죄상을 15가지로 제시하고 거사의 정당성을 밝혔다. 국내외에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변호를 허가하지 않았다. 안중근(安重根)은 1910년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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