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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형제복지원 “그 살인 지옥같은 실체”
[단독] 형제복지원 “그 살인 지옥같은 실체”
  • 박귀성 기자
  • 승인 2018.04.20 0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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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눈 앞에서 끔찍한 장면이!”

[한강타임즈 = 박귀성 기자] 2만여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강제로 끌려가 혹독한 노동과 가혹행위, 성폭행 등으로 인해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고 암매장 당하는 최악의 수용시설 형제복지원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형제복지원에 대해 많은 실화가 쏟아져나오고 형제복지원에서 인권유린에 시달리다 사망한 이들도 553명에 달한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은 20일 현재까지도 국회 출구 정문 앞에서 비닐천막을 치고 과거 저질러졌던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건에 대해 국회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160일이 다 되는 시점까지 노숙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본지 기자가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농성장을 찾아 들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난 18일 오전 본지 기자와 농성중인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자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 한종선 대표와 또 다른 생존자 최승우 씨를 만났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 한종선 대표와 최승우 씨가 18일 국회 출구 정문 앞에서 본지 기자를 만나자 좁은 농성장 안에서 커피를 끓이려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 한종선 대표와 최승우 씨가 18일 국회 출구 정문 앞에서 본지 기자를 만나자 좁은 농성장 안에서 커피를 끓이려 하고 있다.

한종선 대표는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처음엔 아버지가 나와 누나를 보냈다. 나중에는 아버지도 끌려오면서 일가족 모두가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수용됐다”고 충격적인 말부터 시작했다. 본지 기자가 “일가족이 모두 끌려오는 경우가 있었나?”고 다시 되물었다. 한종선 대표는 이어 “가족이 끌려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무조건 길거리에서 차림이 남루하거나 지저분해 보이면 닥치는대로 끌고 왔다”고 회상했다.

한종선 대표는 아직도 과거의 기억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했다. “기자님, 양해 하나 구하겠다. 제가 아직 정신적으로 잠을 자다 깨면 제정신을 못차린다. 이해해 달라”고 했다. 한종선 대표는 “당시 손목을 끊고 자살을 시도한 이도 있었다. 가족을 잃고 살기도 싫었다. 형제복지원은 그야말로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과거 형제복지원 시절을 회상했다.

본지 기자가 “가족이 끌려온 것은 어떻게 알게 됐나?”라고 묻자 “줄 서 있다가 보기도 하고, 집합할 때 마주치기도 했다”면서 “강제노역과 성폭행, 가혹행위는 다반사였지만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언론은 우리(형제복지원 강제 수용자들)를 사회정화 대상이라고 단정한 기사만 내보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종선 대표는 특히 “언론은 우리를 사회에서 일소해야할 정화대상으로 묘사하면서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이런 사회악(거리의 부랑자)을 잘 관리했던 인물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형제복지원에서 사회로 나온 후 박인근 원장을 찾아가 사과나 보상을 요구해본 적은 있는가?’라고 묻자, 최승우씨가 뜻밖에도 “만났었다”고 대답했다.

최승우 씨는 한참동안 기억을 더듬다가 “아마 한 2001년도였을 거다. 우연치 않게 경북 울진군 ‘덕구온천’에서 우연치 않게 만났다. 눈에 띤 거다”라고 박인근 원장과의 우연히 마주치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최승우 씨는 이어 “처음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박인근이다!’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차 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박인근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도망갔다. 감옥에서 나온 줄 몰랐다”고 설명했다. ‘그 후로 찾아가거나 사과나 보상을 요구한 적 없었나?’는 물음엔 “형제복지원 출신 중에 몇 명, 아주 극소수는 보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일부였고 그것도 자기에게 잘보였던 사람으로만 골라서였다. 95%는 사과도 보상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최승우 씨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사실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했던 주민등록등본 이미지 파일을 보여주면서 “박인근 원장이 자신의 동의 없이 형제복지원으로 주거지를 몰래 이전(부산시 북구 주례동 소재 형제복지원으로)을 해놨다”고 말했다.

최승후 씨는 “82년도(당시 나이가 14살) 입소돼 이틀만에 사람이 눈 앞에서 맞아 죽는 것을 2건을 실제로 목격했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면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최승우 씨는 당시를 “형제복지원 사람들 지시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맞아 죽었다. 실제로 사람에게 모포를 둘둘 말아서 형제복지원 사람들 여럿이서 몽둥이로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 사정없이 밟아댔다. 사람이 죽던 말던 인정사정이 없었다. 매를 맞는 사람이 눈이 획 돌아갔는데도 계속 때린다. 피가 흥건했다”면서 최승우 씨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최승우 씨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기가 힘이 들었는지 한참을 침울한 표정을 짓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최승우 씨는 이어 갑자기 앉은채로 경직된 ‘차렷’ 자세를 취사는 듯 복종의 부동자세를 해보이면서 “난 그때 그런 장면을 보면서 쫄아가지고... (감히 반항하거나 거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라고 참혹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최승우 씨는 말을 마치고 허공을 바라보던 굳은 자신의 얼굴을 뻣뻣해 보이는 손바닥으로 찬찬히 쓸어내렸다.

최승우 씨는 ‘그 후 그 피해자는 어떻게 조치됐느냐’고 묻자 “매를 맞던 사람이 눈자위가 ‘휙’ 돌아갔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그러니까 어디론가 인터폰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와서 매맞은 사람을 들고 어디론가 들고 나갔는데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다”고 했다.

한종선 대표와 최승우 씨를 번갈아 바라보며 ‘왜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다시는 (작업장이나 식당 등에서) 보이지 않았고 숙소에서 우리는 감금상태였기에 밖으로 나가 볼 수 없었다. 너무 겁이 나서 감히 따라나가서 볼 용기도 낼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당시 젊은 서른 두 살의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는 우연치 않게 울산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의 강제노동현장을 목격하고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한종선 대표는 이때 중요한 증언을 했다. 이제까지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울산 형제복지원과 부산 형제복지원 두 곳 모두 박인근 원장이 운영하던 곳이었고 강제 수용시설이 더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종선 대표는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 중단에 대해 “그때 김용원 검사가 30명 정도의 수사관을 파견해서 형제복지원을 기습하려고 했지만 검찰 내부의 외압으로 수사가 중단됐다. 형제복지원생들이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강제 노역 현장인 ‘반정목장’과 수용시설에 대한 수사가 절망에 부딪힌 거다.

한종선 대표는 “이렇게 울산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가 중단되면서 부산 형제복지원 관련해서는 손도 못댔다(수사를 착수해보지도 못했다)”라며 “박희태가 외압을 넣으면서 형제복지원 울산 부산 둘 다 서둘러 폐쇄해버렸고 더 이상 우리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한종선 대표와 최승우 씨는 언론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게 형제복지원이 폐쇄가 돼서 우리는 사회로 쏟아져 나오게 됐는데, 언론은 우리를 적대시했다”면서 “험악하고 지저분한 부랑자들이 대거 부산 일대로 쏟아져 나왔다면서 박인근 원장이 이런 부랑자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형제복지원 관리를 합리화 시키는 보도를 했다”는 거다.

한종선 대표는 본지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님, 감금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그는 이어 “감금이란 국가적 위력으로 개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순간부터다”라며 국가가 이들을 강제수용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종선 대표는 “박인근 원장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는데, 그 사람은 국가가 만들어준 법령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우리들을 관리했을 뿐이다. 가혹하게 관리했지만 그것은 인권유린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랑자 소탕을 하겠다는 법령과 제도를 만든 것은 당시 국가였다”고 한껏 격앙된 목소리를 높였다.

한종선 대표와의 대화를 곁에서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최승우 쓴웃음을 지으면서 “국가가 법령을 만들고 그 법을 이용해서 검을 거래가 있었다. 경찰들이 수용자를 (수용시설로) 잡아 오면 그 숫자만큼 돈이 쥐어졌고, 그만큼 경찰들은 수용자 찾아 잡아들이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면서 “심지어는 수용자 중에서는 가족이 찾아와 풀려난 수용자도 다시 잡아왔다.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종선 대표는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 저질러졌던 대표적인 인권 유린 사례가 삼청교육대다. 하하지만 우리 형제복지원 사람들에게 삼청교육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면서 “그렇게 맞아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맞아 죽겠구나’하는 공포가 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삼청교육대는 몇 개월 몇 년 순화기간이 끝나면 나갈 수나 있었지만, 형제복지원은 나갈 수가 없다. 조사도 없고 재판도 없이 무작정 잡아들였으니 언제 나갈 수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나갈 수도 없었다”고 고통스러웠던 당시를 다시 회상하면서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본지의 ‘형제복지원’ 관련 기사는 다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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