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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잃어버린 거리
[신간] 잃어버린 거리
  • 송범석 기자
  • 승인 2018.06.30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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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타임즈 송범석 기자]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꼼짝 않고 누워서 지난 이십 년 동안 몸을 파묻어 감춰왔던 영국 작가라는 두꺼운 갑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꼼짝 말 것.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듯 오랜 세월의 층을 거쳐 마침내 낙하가 완료되기를 기다릴 것. 옛 파리에 착지할 것. 폐허를 찾아 살펴보고 거기에서 자신의 자취를 발견하도록 노력할 것. 그동안 미결 상태로 공중에 떠 있던 모든 의문을 풀도록 애쓸 것.”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열 번째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1984년 발표된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유효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나’를 찾아 나서는 여정은 언제나 진부하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나’가 각인돼 있는, 청춘이 부유하는 모든 공간을 더듬으며 미래의 무늬를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현재 생활에 매겨진 등급은 조우하는 과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내가 조우할 때마다 과거는 늘 다른 빛깔로 빛나고 현재는 그에 따라 다시 한 번 삶에 대한 기지개를 켜기 때문이다. 고정돼 있지 않은 과거, 그리고 그 과거를 먹고 사는 현재, 침묵할 수 있는 미래는 그렇게 완성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이름의 추리소설 작가이다. 하지만 ‘영국 작가라는 두꺼운 갑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는 독백 같이 그는 껍데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8편이나 되는 시리즈물을 써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은 그를 촘촘하게 감싸고 있다.

이십년 전 그는 장 데케르라는 이름의 프랑스 청년이었다. 특별한 것도, 놀라운 것도 없는 그의 청춘은 프랑스 파리에서 반짝 거렸다. 그에게는 여러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이미 파리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처럼, 그의 청춘도 파리 속에 ‘잃어버린’ 것처럼 부유하고 있다. 그 부유물을 잡기 위해 다시 파리로 돌아온 장 데케르는 흐릿한 기억을 천천히 더듬으며 과거를 추적해 나간다.

“정원사는 육십대로 보였는데 은빛 머리칼이 검은 피부와 대비되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를 관찰하면 할수록 그가 내 오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확신이 굳어져갔다. 그 정원사 역시, 흑인이었고, 제네랄르모니에대로 쪽에서 튈르리공원에 들어서면 보이는 첫 번째 큰 연못 오른쪽 잔디밭의 잔디를 깎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느 날 아침 오늘처럼 인적 없이 햇빛만 가득 쏟아지던 공원에서 보았던 광경이었다. 잔디 깎는 기계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풀내음이 풍겨왔다.”

예전에 알던 사람을 다시 알아보는 이 장면에서 저자는 자신이 새겨진 도시의 흔적을 더듬는다. 이제 아무도 그가 누구였는지, 말해줄 수 없는 세월을 건넌 그가, “과거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는 기억의 편린을 얻은 셈이다.

저자는 “빛나는 청춘을 함께 보냈던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모두가 갖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기억하지는 못하는, 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게 변한다. 시간도, 상념도. 다시 한 번 만져보고자 손을 뻗으면, 이미 공중 속으로 흩어지는 기억들. 폐허가 된 과거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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