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
[신간] 산소 도둑의 일기 
[신간] 산소 도둑의 일기 
  • 송범석 기자
  • 승인 2019.04.26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강타임즈 송범석 기자]  별도의 마케팅 도움 없이 ‘자비 독립 출판물’로 이례적으로 아마존 연간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산소 도둑의 일기>. 

소설의 방향은 ‘혐오’로 향하고 있다. 소설 속 독백을 주도하는 1인칭 화자는 스스로를 ‘여성 혐오자’라고 말한다. 그는 반문한다. 왜 사람들이 서로를 상처 입히고, 죽이는지. ‘우리’가 아닌 ‘타자’가 왜 그렇게 미워지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최근 나오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회과학 서적 역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진중한 의미적 무게감을 내포한다.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타성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논제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서로 죽이겠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을 즐기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걸까? 영혼을 산산조각 내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범행을 저지르는 가해자 역시 동일한 일을 겪어 보는 편이 더 좋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남에게 더 능숙하게 상처를 준다.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전문가들은 관연 어느 쪽을 베면 더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다.” (p21)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상처를 준다는 논리적 궤적은 결국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죽음이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배태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자신을 좋아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잔인하게 토막낸 뒤 망가져가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꼈던 가학성 취미가 있는 주인공이 똑같이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이 끊이지 않는 비극적 연쇄를 ‘공식’이라고 표현한다.

“공식은 완벽하다. 간호사는 점점 자기 환자한테 연민을 느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려 한다. 하지만 환자는 외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자초한 상처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간호사는 이런 고통으로부터 환자를 구하고자 한다. 환자는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똑같이 느껴보기를 원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그를 이해하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그를 따라 고통을 자초한다. 이제 환자가 둘로 늘어났다. 뭐,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p272)

무심한 듯 잘나가는 플레이보이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드라마에 단골 출연하는 ‘인성 쓰레기’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까닭은 인간이라는 객체는 각자의 고통에 빠지게 되면, 다른 객체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어보길 원하는 심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익명인’인 저자는 그 점을 냉철하게 포착하고 있다.

한편으로 끊임없이 폭력과 혐오가 정당화되는 화자가 잘 짜인 각본에 당해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면 묘한 쾌감이 일렁인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고통을 주는 쪽. 아니면 고통을 줬던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인과응보의 서사를 보며 즐기는 쪽. 어느 쪽이든, 그저 열등감의 한 축일 뿐이라고, 이 책은 넌지시 교훈을 전한다.

“사실은 누군가 나보다 뛰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숭배하듯 잔뜩 떠받드는 방식으로 나의 분노를 숨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겉으로는 내가 마음 넓고 관대해 보이므로, 칼을 꽂아 넣으려 할 때조차 신뢰받을 수 있었다.” (p153)

익명인 지음 / 민음사 펴냄
 

  • 한강타임즈는 언제나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전화 02-777-0003
  • ▶ 이메일 news@hg-times.com
  • ▶ 카카오톡 @한강타임즈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