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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의 즐거움과 아쉬움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재봉 교수
금강산 관광의 즐거움과 아쉬움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재봉 교수
  •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재봉
  • 승인 2006.12.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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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금강산을 다녀왔다. 늦어도 수백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산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뛰어난 글재주로 묘사해온 터라 나의 서투른 글솜씨로 금강산 기행을 남긴다는 게 좀 부담스럽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 쓰든 못 쓰든 글쓰는 짓을 벌어먹고 사는 일의 한 부분으로 삼는 사람이 여행기를 한 줄도 남기지 않으면 허전할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나는 방북기를 한 권의 두툼한 책으로 묶어낼 수 있을 만큼 북녘을 둘러본 뒤에는 적지 않은 글을 쓰지 않았던가.

    북녘 사람들은 금강산보다 묘향산을 더 명산으로 치는 경향이 있다. 400여년 전 서산대사가 “金剛秀而不壯.... 妙香亦秀亦壯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장엄하지 못하고.... 묘향산은 빼어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하다)”이라고 남긴 시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말고도, 평양에서는 금강산보다 묘향산에 가기가 훨씬 쉬운 지리적 이유도 있을테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받은 수십만 점의 선물을 전시해놓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자랑하고 싶은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런 탓인지 내가 1998년 평양에 처음 들어갔을 때 북녘 사람들은 ‘공짜’ 묘향산 방문을 적극 권유했고, 난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천하제일명산’에 올라 계곡에서 수영까지 하게 되었다. 그 뒤부터 작년까지 묘향산을 두 번 더 방문하고 금강산에 한 번 올랐는데 모두 공교롭게 9-10월 가을철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2월 초겨울의 눈쌓인 금강산을 찾은 것이다.

    금강산에서는 만개의 돌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만물상’이 으뜸가는 절경이라면, 묘향산에서는 만개의 폭포가 계곡을 따라 줄줄이 어우러져 있다는 ‘만폭동’이 최고의 절경일 것이다. 금강산은 돌로 유명하고 묘향산은 물로 유명하다는 북녘 사람들의 말을 뒷받침하는 얘기다. 그러나 금강산 구룡연 코스를 따라 올라가며 만나는 옥류담 연주담 상팔담 등의 옥색이 감도는 물은 묘향산 만폭동 계곡의 물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금강산은 돌뿐만 아니라 물도 유명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물상의 절경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금강산 여행기를 쓰기 부담스러운 이유 가운데 하나다. 서투른 글솜씨로 수식어 몇 개 어설프게 나열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다녀본 나라 안팎의 어느 산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단풍으로 뒤덮인 가을철 풍악산의 경치보다 눈으로 뒤덮인 겨울철 설봉산의 풍경이 백배 천배 황홀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금강산은 철에 따라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 설봉산 등으로 불리는데 다섯 이름 가운데 겨울철 이름만 두 개인 것을 보면 겨울의 금강산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리라. 금강산은 이름을 따라 적어도 한 철에 한 번씩은 올라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했으니, 다른 철엔 한 번씩 들르더라도 겨울엔 두 번을 들러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거듭 말하건대 겨울의 금강산은, 특히 눈꽃과 아우러진 만물상의 모습은, 환상적일 만큼 멋있었다. 북녘에서는 금강산과 묘향산 둘 다 ‘천하제일명산’이라고 치켜세우는데, 어느 쪽이 진짜 ‘천하제일’이냐는 난처한 질문에 2005년 묘향산 등반을 안내하던 북녘의 젊은 여성은 묘향산이 ‘천하제일명산’이고, 금강산은 ‘세계제일명산’이라고 재치있게 대답했지만, 만물상의 설경은 그야말로 ‘우주제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날 반하게 만든 것은 만물상의 설경뿐만이 아니었다. 구룡연 코스 등반을 안내했던 북녘의 젊은 여성 역시 내 맘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남이랑북이랑」 금강산 관광단 가운데 가장 연로한 60대 부부와 함께 오르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좀 늦게 등반의 종점인 관폭정에 이르자, 전북대 오관석 박사가 북녘의 여성 안내원과 얘기를 나누다 나를 소개했다. 대학에서 북한에 관해 강의하는 교수이면서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대뜸 이재봉 교수냐고 물었다.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아느냐는 되물음에 많이 들어보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 이름은 박은주. 내가 북녘에 관해 공부하면서 통일운동을 한다니 나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남쪽의 정세도 꽤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북녘 사람들과 한두번 만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정치나 통일 문제에 관해서는 평양의 대남 정책 관계자들과 오래 전부터 많은 얘기를 해온 터에, 아름다운 산에 올라 게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까지 복잡한 정치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 오박사의 요청에 따라 나보다 더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그녀와 함께 사진 몇 장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여섯명의 일행과 천천히 산을 내려오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앞에 재봉 선생 아닙니까? 이제야 내려가십니까?” 하고 말을 건넨다. 그녀와 한 조를 이루어 등반 안내를 맡은 북녘 남성이다. 마침 목란관 근처에 포장마차가 있어 우리 일행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로 하고 그들도 불렀다. 근무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그들에게 강요하다시피 한 잔씩 권하며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가, 원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을 하다 금강산 안내원이 되었다는 그녀에게 나이를 물으니 스물 여섯이란다. “내가 몇 살만 덜 먹었어도 박선생에게 같이 연애하자고 수작을 부려보겠는데 ....” 하자, “저는 교수 선생을 큰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고 받아넘긴다. 일행은 내가 한 방 크게 얻어맞았다며 폭소를 터뜨리는데, 난 그녀의 순간적인 재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미모와 재치를 겸비한 젊은 북녘 여성을 연인으로 꼬이지 못하고 조카로 삼게 된 사연이다.

    이번 여행중 좋았던 점 한 가지만 더 꼽는다면 온천을 맘껏 즐긴 일이다. 보통 때는 한 번 이용하는데 12달러지만 우리 일행은 1만원에 자유이용권을 살 수 있었으니, ‘뜨거운 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동네 이름 ‘온정리 (溫井里)’가 가리키듯 예부터 이름난 금강산 온천을 싼값으로 실컷 이용한 것이다. 게다가 성수기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남탕과 여탕을 바꾼다는데 비수기에는 매일 바꾸는 바람에 이틀 동안 온 몸으로 양기와 음기를 골고루 취했으니 정력 보강과 회춘에 털끝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일행 가운데 40대 초반의 한 서울 여성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선녀가 된 기분이 들어 세 시간이나 즐기는 통에 그녀와 저녁 약속을 했던 남자는 생배를 곯아야 했다. 온천이 너무 좋은 것도 탈이랄까.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이처럼 즐거움만 맛본 것은 아니었다. 아쉽거나 유감스러운 일도 있었단 말이다. 이틀째인 9일 오후 교예 (서커스) 관람 대신 산책이나 운동을 하고 싶었다. 일행 가운데 몇 사람이 날 따라 교예를 관람하지 않으려는 뜻을 비치기에 공연이 시시해서가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인데 난 이미 몇 차례 보았기 때문이라며 공연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숙소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기사에게 온정각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얼마냐 되느냐고 묻자 버스로 10분 남짓 걸린다고 한다. 숙소에서 온정각을 거쳐 온천까지 1시간 정도 뛴 다음 온천욕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 길을 뛸 수 있겠느냐고 다시 물으니 안된단다. 도보로 다니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차량도 9시 이후엔 통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당한 호기심과 어느 정도 오기를 지닌 나로서는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운동복 차림으로 바꿔입고 나와 뛰기 시작했다.

    해금강호텔에서 시작하여 고성항횟집을 지나 금강산해수욕장 산책로를 돌아와 온정리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는데 길옆 산언덕에 자리잡은 경비 초소에서 호각을 분다. 못들은 체하고 계속 뛰자 호각 소리가 길고 커진다. 멈추고 돌아서서 초병에게 날 부른 것이냐고 능청을 떨자 손짓으로 뒤로 돌아가란다. 왜 못가게 하느냐고 물어도 반마디 대꾸도 없이 호각과 손짓을 이용해 돌아가란다. 길을 건너 그에게 다가가자 양팔을 내저으며 계단으로 올라오지 마란다. 저 만큼 위에서 돌아가라는 손짓만 신경질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남쪽 관광객들과 무슨 말이든 한 마디도 하지 마라는 훈령을 받았을 그에게, 선생이 얘기할 수 없다면 나와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책임자를 불러달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초소에서 20-30m 떨어진 초병 숙소 같은 건물에서 상급자로 보이는 군인 두 명이 나온다. 둘 다 허리에 권총을 찬 모습에 기가 꺾이려 한다. 초소 책임자들이냐고 묻자 그렇다기에 항의 섞인 질문을 던졌다.
“남쪽에서 온 관광객인데 온천까지 뛰어가고 싶습니다. 버스 타고 가는 대신 운동 삼아 뛰어가서 목욕하고 싶은데 왜 못가게 하는 겁니까?” “사람 통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글쎄, 왜 안된다는 말입니까?” “상부의 지십니다.” “골목길로 빠지지 않고 큰길로만 뛰어갈테니 상부의 허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관광증 좀 보자요.” 관광증을 건넸더니 기다리라 해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좀 이따 전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나와 관광증을 건네주며 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또 들어간다. 상부에 전화해놓고 답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들이 “안 된다면 안 돼!”라고 소리치면 끝날 일인데 배려와 성의가 고맙다. 내 얼굴엔 일부러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한참 이따 다시 나와 공손하게 말한다. “교수님, 이 길은 걸어다닐 수 없답니다.” “알았습니다, 책임자 선생들. 수고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들은 날 남쪽식으로 불렀고 난 그들을 북녘식으로 불렀으니, 말에서부터 이렇게 서로 닮아가다 보면 그게 바로 통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다시 금강산해수욕장 주위와 「현대아산」 직원들 숙소 주위를 한 바퀴 뛰고 나서 온정각으로 향하는 버스 대신 트럭을 한 대 세워 올라탔다. 기사에게 마지막 경비 초소를 지나자마자 내려달라고 부탁하여 거기서부터 다시 뛰기 시작하는데 이젠 저 앞에서 누가 호각을 불며 다가온다. 「현대아산」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이 구간엔 차량이 많아 위험해서 뛰어다닐 수 없게 되어있으니 운동을 하려면 옥류관 근처 산책로를 이용하란다. 다음부터 그렇게 하겠다며 온천까지 뛰어가 교예 공연 시간이라 텅 빈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신선 흉내를 내보기도 하니 금강산 자락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키며 맘껏 달리지 못한 아쉬움이 가신다.

    한편, 온정각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에 승객이 나 혼자여서 기사와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온정각으로 향하는 트럭 기사와도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을 포함해 금강산에서 일하는 기사들은 대부분 중국 옌볜 지역에서 온 조선족들이다. 생활비 (월급)는 약 600달러, 우리 돈으로 60만원 안팎이란다. 「현대아산」에서 중국 돈으로 계산하여 매월 옌볜 집으로 보내기 때문에 자신들은 한 푼도 직접 받지 못한단다. 숙식을 제공받으니 별 어려움이 없다지만 불만은 큰 것 같다. 휴가는 1년에 한 차례 한 달간 받는 대신 11개월 동안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단다.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공휴일이든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룡연 코스든 만물상 코스든 관광객들이 등산하는데 3-4시간 걸리기 때문에 그 때 쉴 수 있지만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대기’이지 ‘휴식’이 아닐 것이다. 60만원이 중국의 월급 수준으로는 적은 게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월급을 깎더라도 적어도 한 달에 며칠은 제대로 쉬게 해야 되지 않을까.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 사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아서 노동자들에 대한 그 재벌의 횡포에 남쪽 진보 세력의 비판이 좀 무딘 것 같지만 이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가족과 전화는 맘대로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숙소에 전화가 있기는 하지만 옌볜까지 1분에 2달러란다. 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한 전화가 많이 나와 한국에서 중국이나 미국까지 1분에 20-30원이면 되는데, 금강산에서 옌볜까지 2,000원 안팎이라니 어이가 없다. 나중에 「현대아산」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를 확인해주며 금강산에서 서울까지는 3,000원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런 게 바로 분단에 따른 경비요 폐해다. 마지막날 금강산을 떠나려는 버스 안에서, 조선족 기사와 ‘조장’이라 불리는 「현대아산」 소속 안내원을 잠시 버스 밖에 세워놓고, 일행에게 그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얘기해주며 가족에게 전화라도 몇 차례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고 호소했다. 5만원쯤 모였다.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액수일지라도 가족과 몇 차례 통화할 수 있는 비용은 될 것이다.

    이번 관광에서 한 가지 더 언짢은 기분이 들게 한 것은 남쪽의 한 단체가 내건 온정각 광장의 커다란 현수막이었다. 남쪽의 대표적인 통일 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인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 (겨레하나)」 이름으로 된 현수막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1만 2천 금강산 기행”이란 잘못된 표기 때문이다. ‘기행 (紀行)’이란 여행 중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은 글로, ‘기행문’이나 ‘여행기’와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여행의 기록’이 아닌 ‘여행’ 자체를 ‘기행’이란 말로 잘못 쓰고 있다. “기행을 간다”거나 “기행을 떠난다”는 말이 나오는가하면 “기행 운동”이란 말까지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평화’나 ‘통일’이라는 말 뒤에는 으레 ‘기행’이란 말을 써야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실은 나도 2001년 학생들과 판문점을 견학한 뒤 󰡔통일뉴스󰡕에 “판문점으로 통일 기행을 다녀왔다”고 쓴 적이 있으며, 2006년 국정원 초청의 백령도 방문을 구상하면서 󰡔남이랑북이랑󰡕에 “백령도 통일 기행 계획”이나 “백령도 통일 기행 일정”이라는 잘못된 말을 두어 차례 쓴 적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말 바로 쓰기 운동’을 벌이면서 맞춤법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있게 지킬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기도 했던 내가 ‘여행’과 ‘기행’을 혼동하는 무식을 드러냈던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국어 사전을 몇 차례나 뒤적거리고 있지만 잘못된 말이나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기가 있을지 두렵다.

    그래서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셈일지라도 ‘기행’이란 말이 잘못 사용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금강산으로 떠나기 며칠 전 「겨레하나」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 때 마침 󰡔겨레하나 NEWSLETTER󰡕를 이메일로 받았는데, “파주, 철원 민통선 지역으로 떠나는 겨레하나 평화통일기행”과 “화해와 평화를 위한 1만 2천 금강산 기행”이라는 제목의 글들이 크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우리 겨레가 하나가 되자는 통일 운동을 벌이면서 쉬운 우리말로 ‘소식지’라고 쓰는 대신 ‘NEWSLETTER’라는 영어를 쓰는 게 좀 어색해 보인다는 점도 이 기회에 밝힌다.

    「겨레하나」는 남쪽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대북 지원과 통일 운동을 벌이는 단체로 많은 통일 운동가들이나 단체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단체에서 쓰는 말이나 구호는 잘못된 것일지라도 순식간에 널리 퍼질 수 있다. 마침 나는 「겨레하나」의 운영자들과 활동 내용을 잘 아는 편이고, 많지 않은 액수지만 매달 후원금을 보내며, 몇 달 전엔 이 단체를 통해 북녘에 「남이랑북이랑」의 수해 복구 지원 성금 1천만원을 보낸 터여서, 애정을 갖고 부담 없이 제안했던 것인데 아직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 「겨레하나」에 공개적으로 그러나 정중하게 요청한다. ‘기행’의 오용이 더 널리 퍼지지 않도록 금강산 온정각 광장에 내건 현수막의 잘못된 표기를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현수막을 바꾸어 달아야 한다면 그 경비는 내가 기꺼이 부담하겠다.

    참고로, ‘기행’의 오용과 관련하여, 남쪽에서 가장 활발하게 평화운동을 펼쳐온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평통사)」 전북지부에서는 12월 4일 내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DMZ 평화기행 - 평화기행에 함께 해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쪽의 가장 큰 통일 운동 단체인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통일연대)」 전북지부에서는 12월 11일 펴낸 소식지 󰡔야! 통일시대󰡕에 “화해와 평화를 위한 새해맞이 금강산기행”과 “고3 수험생과 함께 하는 DMZ기행”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또한 “국내 유일의 인터넷 통일전문 정론”인 󰡔통일뉴스󰡕는 12월 11일 올린 “겨레하나 평화통일기행서 만난 시 3편”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기행해설가로 동행했던 사진가 이시우”라는 표현까지 썼다. 난 「전북평통사」 지도위원이요, 「전북통일연대」 소식지 편집위원장이며, 󰡔통일뉴스󰡕 자문위원으로 이름이 올려져 있다. 돈 몇 푼 내는 것으로 ‘지도’하고, 소식지가 언제 무슨 내용으로 나오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편집’하며, 글 몇 차례 싣는 것으로 ‘자문’하고 있으니, 이참에 이런 모든 형식적인 자리에서 내 이름을 빼고 싶다.

    며칠 뒤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평화운동가 김승국 박사가 매주 펴내는 󰡔평화만들기󰡕에는 내가 매달 󰡔남이랑북이랑󰡕에 쓰는 글이 그대로 옮겨 실리고 있는데, 12월 1일자 󰡔남이랑북이랑󰡕에 실은 “이재봉의 통일 여행”이란 제목의 글이 12월 20일자 󰡔평화만들기󰡕엔 “이재봉의 통일 기행”으로 바뀌어 실린 것이다. ‘여행’이라는 쉽고 바른 말을 굳이 ‘기행’이라는 어렵고 틀린 말로 고친 것에 불만과 당혹감을 떨치기 어려웠지만, 나의 지적에 다른 단체 관계자들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사과하고 잘못을 바로잡아준 김박사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평화 운동이나 통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기행’이란 잘못된 말을 남용하는 이유가 뭘까. ‘여행’은 가벼운 느낌이 들고, ‘관광’은 노는 느낌이 들며, ‘방문’은 딱딱한 느낌이 드는데, ‘기행’은 고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럴까. 난 평화 운동이나 통일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은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쉽고 평범한 말과 글을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렵거나 고상한 말을 쓰면 ‘그들만의’ 운동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평화 운동이나 통일 운동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나 특별한 사람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평화나 통일로 가는 길이나 문은 넓을수록 좋고,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담이나 벽은 낮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초등학생들부터 60대 노인들까지 탄 금강산행 버스 안에서, 금강산을 찾아가는 것도 평화 운동이요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돕기 위해 조그만 돈이라도 내면 통일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관광객들 모두 평화 운동가와 통일 운동가가 되어달라고 부추겼다.

    나는 새해 2월중 관광객을 모집하여 3월 9-11일 다시 금강산 통일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먼저 온정각 광장에 도착하면 “금강산 기행”이란 잘못된 표기를 바로잡은 현수막이 나를 포함한 방문객들을 맞아주리라 기대한다. 구룡연 코스에서는 아름답고 재치있는 북녘의 조카와 또 만나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만물상 코스에서는 여전히 환상적인 설경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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