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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보도와 사사오입 문제
리얼미터 대표 이택수
여론조사 보도와 사사오입 문제
리얼미터 대표 이택수
  • 리얼미터 이택수
  • 승인 2008.02.25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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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고교시절.

내신 등급을 산정할 때 각 과목별 점수를 ''수우미양가'' 5단계로 나누던 시절, 88점을 맞아 여유 있게 ‘우’가 됐을 때 보다 80점을 맞아 ‘우’에 턱걸이 했을 때가 훨씬 기뻤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무척 속상했다. 88점이 80점보다 2문제를 더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우’ 단계에 포함되는 현실에, 필자는 결국 전략적으로 공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즉, 한 과목을 100점 맞고 다른 과목을 88점 맞는 것 보다는, 한 과목을 92점 맞고 다른 과목을 80점 맞는 것이 훨씬 전략적인 공부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자가 총점이 188점이고 후자가 172점으로, 16점의 격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같은 등급으로 분리되니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대입 수능 등급제가 비판을 받은 것이리라. 점수를 등급으로 ‘듬성듬성’ 나눔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불이익을 얻는 수험생들이 더이상 없도록 하기 위해 수능 등급제는 그래서 사라지게 됐다.

미국 코넬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이 이렇듯 억울한 사람들의 심리를 수치화한 바 있는데 바로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표정이었다. 1992년 NBC의 올림픽 중계 화면을 분석,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순간과 시상식에서의 짓는 표정을 분석한 바, 은메달리스트보다 동메달리스트의 얼굴 표정이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동메달리스트는 메달을 하마터면 못 딸 뻔 했는데 땄으니 행복하고, 은메달리스트는 목전에 있던 금메달을 놓쳤으니 표정이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은데 실제 자료를 분석하고 계량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80점의 ‘우’를 얻은 학생과 88점의 ‘우’를 얻은 학생이 성적표를 받을 때도 그러한 표정이었으리라.


각설하고.

여론조사에서도 그러한 논의가 있다. 바로 사사오입의 문제다. 자유당 시절 사사오입 개헌을 떠올릴 수 있으나 그런 거 아니고, 일부 여론조사 기관 연구원이나 기자가 지지율 표기시 사사오입 주장을 계속 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여론조사 보도는 사사오입 방식을 채택하는데, 가령 38.5%나 39.4%나 모두 39%로 보도한다는 것으로서, 미세한 지지율 차이에 대한 오해와 소숫점 이하 표기가 더 정확하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우리나라도 사사오입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있어서는 경험과 연구가 훨씬 많은 미국이기에 일견 일리 있어 보이지만, 필자는 고교때 ‘수우미양가’ 등급 제도가 생각나서 선뜻 사사오입 '개헌(?)'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독자의 알권리다. 사사오입을 주장하는 쪽의 입장은, 오차범위 내에서도 특히 1%p 가량의 격차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에 38.5%나 39.4%나 39%로 보도하자는 입장이지만, 필자, 그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즉 표집오차 범위가 95% 신뢰수준에서 ±3.1%인 1,000명의 여론조사에서 A후보가 385명의 지지를 얻어 38.5%이고 B후보가 394명의 지지를 얻어 39.4%의 결과가 나왔을 때 그것이 매우 미세한 차이고 오차범위 내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무의미한 비교라 할지라도, 조사 결과 자체는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차범위 내에서 순위가 뒤바뀔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10여년 전, 필자가 모 정당 연구소에서 대통령 후보에게 보고되는 여론조사 보고서를 대선기간 1년동안 직접 작성했었는데, 만일 그때 모시고 있던 후보가 39.4%로 나오고, 다른 당 경쟁 후보가 38.5%로 나왔다면 두 후보 똑같이 39%로 보고할 수 있었을까? 물론 반대로 경쟁 후보가 39.4%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동률로 보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차범위 내이고 미세한 차이라 두 후보 모두 사사오입하여 39%로 동률이라고 보고했다면, 당시 모시고 있던 후보 필자의 보고서를 보고 답답해했을 것이 분명하고, 필자의 보고서를 더이상 받으려 하지 않았으리라. 만일 필자가 여론조사 전문기자였다고 해도, 정치부장에게 소숫점 한자리 결과를 누락시킨 채 두 후보를 동률로 보고했다면 그 부장님 또한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필자가 그러한 보고서를 보고할 대상은, 이제 대선 후보가 아닌 독자와 유권자들이다. 최종 조사결과를 받아 보는 사람이 대선후보가 아닌 유권자라 할지라도, 조사를 하여 발견해 낸 팩트(Fact)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고, 다만 오차범위 내의 격차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여, 필자는 미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사사오입의 보도경향을 도입하는 데 반대한다.

두 번째는 유권자 한 사람의 가치다. 1천명 조사하여 385명(38.5%)의 지지를 얻은 A후보와 394(39.4%)명의 지지를 얻은 B후보가 둘다 390명(39.0%)으로 보도된다면, A후보는 없던 지지자 5명을 얻은 셈이 되고 B후보를 지지한 394명 중 4명은 불가피하게 여론조사 보도에서 배제되게 된다. B후보 지지자 4명은 차라리 조사에나 응하지 말 것을, 조사에 참여해놓고도 여론조사 보도에서 누락된다면 그 유권자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누가 보상하랴. 필자가 운영하는 리얼미터, 작년 하반기부터 직접 전화면접(CATI) 조사센터를 구축하여 전화면접 조사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응답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최근 선거 시즌을 맞아 경력이 있는 전화 면접원을 구하기도 힘들고, 면접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또 반대로 응답을 해주는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도 어찌보면 귀찮은 전화에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여 응답을 해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왜 사사오입으로 1,000명의 조사에서 적지 않은 지지자들을 솎아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1천명 조사에서 만약 4명 지지자 밖에 얻지 못한 후보가 있다면 0%로 보도되어야 하니, 그 후보나 지지자 입장에서 보면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후보에게는 응답받지도 않은 5명의 표를 거저 주고 말이다.

그럼에도 사사오입을 해야 할까?

앞서 표현했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유권자, 그중에서도 여론조사 보도를 접하는 독자나 시청자들의 수준은 이제 사사오입을 하지 않아도, 여론조사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눈높이가 많이 높아졌다. 눈높이가 아직 높아지지 않은 일부 독자들에게는 작은 격차가 갖는 의미에 대해 여론조사 보도기자가 잘 설명해주면 되고, 눈높이 높아진 독자들에게는 조사결과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여 알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고 선진화된 여론조사 보도라고 생각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국민이 대통령이고 유권자가 왕이기 때문이다. 독자와 유권자들을 믿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그게 여론조사 기관과 여론조사 담당 기자들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다.


새 대통령의 통치권이 막 시작된 월요일 새벽에.
리얼미터 대표 연구원 이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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