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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현옥의 문화비평>
“아름다운 언어는 향기! 멀리 계십시오”
<엄현옥의 문화비평>
“아름다운 언어는 향기! 멀리 계십시오”
  • 한강타임즈
  • 승인 2008.04.2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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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언어는 향기! 멀리 계십시오” "천리향(千里香)" 엄현옥 /문화평론가 차창을 스치는 열대 식물의 너른 잎이 싱그럽다. 동양과 서양의 공원을 합쳐놓은 듯한 이 곳의 느낌은 평화롭다. 깨끗한 열대 정원의 도시 싱가포르 시내에서 멀지 않은 보타닉 식물원(Botanic Gardens)이다. 보이는 곳마다 초록이 넘치는 식물원에 들어서니 숲 특유의 내음이 후각을 일깨운다. 서울에서는 물난리가 났다는데 이곳은 별천지다. 바람결에 실려온 꽃향기가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천리향(千里香)이 무리를 지어 서 있다. 오랜 세월 그곳에서 터를 잡은 과수원의 나무들처럼 가지도 무성하다. 옹이가 박힌 단단한 고목 나무들이 피워낸 꽃이어서인지 바람결에 경박스럽게 하늘거리지 않는다. 꽃 술 안쪽은 주황빛이 도는 진노랑이더니 꽃잎 끝으로 갈수록 연해진다. 꽃조차도 날이 갈수록 옅어지는 열정과 무디어지는 감성을 따라 피는 것일까. 천리향, 낯익은 꽃이다. 천경자 화백의 화폭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머리를 무수히 장식했던 꽃이기에 얼마 전 보았던 그녀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남서울 분관에서 그녀의 작품전이 열렸다. 옛 벨기에 영사관 건물이었다는데 외벽의 낡은 벽돌이 미술관과는 잘 어울렸다. 더욱이 리모델링했다는 그곳은 전생이 황후였다고 고백한 화가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작은 방들은 대규모 전시관에 비해 작품에 몰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미술관은 그녀가 살았음직한 퇴락한 왕족의 저택을 연상시켰다. 파티복 차림에 잔잔한 음악이라도 흐른다면 천화백이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한 듯한 설레임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녀가 정겨운 사투리로 작품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그것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인지 자서전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작품들 앞에서 혼돈스러웠다. 그림에서 묻어나오는 것들은 그녀가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들의 정한(情恨)이었다. 20년 전, 그림보다 먼저 수필집 《한(恨)》으로 만났던 작가로서의 이미지가 생생하다. 그 어느 화가의 작품이 그녀보다 더 환상적일 수 있을까. 한동안 그토록 매료되었던 그녀의 자취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나라가 다민족 국가로 조화를 이루듯이 식물원의 수종은 4천여 종이 넘는다. 햇빛과 잦은 소나기, 높은 습도 등이 이곳을 더욱 푸르게 하고 있다지만 내게 있어 천리향이 아닌 수목들은 이제 관심 밖이다.떨어진 꽃잎을 주워 머리에 꽂은 관광객들이 렌즈를 향해 웃고 있다. 쑥스러움도 잊은 채 모델을 자처한다. 너도나도 그녀 화폭 속의 여인이 된다. 함께 보고 싶은 생각에 나비를 찾아보았으나 푸른 하늘만 시야에 가득하다. - 슬픈 전설의 22페이지-그녀의 작품이 초기의 사실주의 인물화를 벗어난 것은 여동생의 죽음과 괴로웠던 사랑의 경험, 이혼의 아픔들이 담기게 되면서부터였다.그녀의 수필을 읽었던 20대의 나는 화가의 평탄치 않았던 젊은 시절과 굴곡 많은 사랑의 소용돌이조차 부러웠다. 그녀의 삶에 지워진 큰 매듭들은 이미 화가 개인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고독과 우수가 담긴 내적 감정을 캔버스에 투영시켰으니 그림 속의 여자는 화가 자신이며 머리에 얹은 꽃과 뱀은 한이었다. 그녀의 삶이 평탄하고 원만했었다면 결코 배어나올 수 없는 영혼의 절규가 그의 화폭을 점령했으니 작업은 그녀에게 있어 세상과 교감하는 통로였으리라.한을 삭히고 무수한 세월의 서리를 묵묵히 견뎌온 캔버스 속 여인들은 우수에 찬 표정이었다. 화가에게 한이란 타인에게 피해 받지 않아도 생기는 좌절감과 실현되지 않은 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이 많은 사람일수록 꿈이 많다는 등식도 가능하다. 좌절된 그녀의 꿈,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작품〈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없이 그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긴 목과 풀어헤친 생머리, 퀭한 두 눈,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꽃과 여인과 뱀이 굿판을 벌인다. 스물 두 살의 결혼과 첫 딸 출산, 과거의 경험을 우울하게 회상하는 작품 속에서 고통의 상징이자 수호신이었던 뱀을 화관으로 쓰고 있다. 비스듬히 꽂은 장미 한 송이는 푸른빛 때문인지 애잔하다. 먼 곳을 응시하는 여인의 시선은 질곡의 세월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서늘한 느낌이다. 자기의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그렸을 이 작품에서는 인생을 체념하고 초월하려는 태도마저 엿보인다.뱀에 대한 화가의 경험은 남달랐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광주로 내려가던 중 꽃 뱀 두 마리가 찔레꽃 밑으로 지나는 환영을 보았던 것이다. 또한 뱀띠 남자와의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인해 뱀을 그리며 생활고와 혈육의 죽음, 순조롭지 않은 결혼과 연애의 시련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았다. 화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갖는다는 작품으로 한국 화단에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켜주었던 〈생태(生態)〉에는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수한 뱀의 무리가 가득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뱀, 갑사띠인 줄 알고 뱀을 주워 준 소녀는 화가가 되어 그것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 이면에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인습과 도덕률에 젖은 화단에 대한 반기였으리라.뱀 덕분에 모든 파충류를 유난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처음에 뱀을 즐겨 그리는 그녀가 섬찟했다. 그 그림들 앞에서는 즐거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파스텔 톤의 우유부단함 속에 숨어버리기를 즐기는 나는, 청탁(淸濁)의 구분이 모호하여 나도 나를 알지 못하는 때가 많다. 고통마저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되새김질하는 그녀의 치열함과 예술적 광기(狂氣)는 외경스러움마저 갖게 했다. 〈생태〉를 가득 채운 그것들은 누렇게 바랜 얼룩 때문인지 그저 순해 보였다. 사람을 물거나 독을 옮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웅크리고 있는 그것들은 용트림을 안으로 삭힌 듯 웅크리고 있을 뿐 꿈틀거림을 멈춘 것은 아니리라. 가늘고 굵은 뱀들은 서로 몸을 부비며 천연덕스럽게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그 중 초록 뱀 두 마리는 서로 몸을 꼬고 캔버스 위에서 다른 뱀들과는 몸을 섞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쉽사리 버릴 수 없는 잔상으로 남은 그녀의 작품들과 뱀에 매료되어 광주역 부근의 뱀탕집을 찾아다니며 스케치하는 화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작가의 감정이 솔직하게 전달되는 뱀은 이처럼 그녀 인생의 구원자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련의 영상이야말로 작가의 삶의 기록이며, 인생 역정의 수많은 질곡 속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그녀는 행복했으리라. 상처 없는 아픔을 운위할 수 없듯이 고통 없는 삶에서 피운 예술의 꽃을 바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천리향(千里香)-뉴욕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녀는 훌쩍 여든을 넘었다. 타이티의 여인인 양 생명력이 느껴지는 화폭에서의 그녀는 지금도 영원한 젊음을 구가하고 있는데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말년에 치른 작품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공방도 이 땅에서의 아픈 기억이리라.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일본 유학 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군 거장으로, 1998년에는 200여점의 작품을 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자신이 이룬 예술적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녀는 체념의 무게가 실린 작품이건 신명나는 그림이건 가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해 내는 매력적인 예술가였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 서울 시립미술관 들어서면 그녀가 작업 중인 생생한 장면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언제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그녀는 늘 우리와 가깝다. 어떠한 소리보다아름다운 언어는향기멀리 계십시오.오히려천리밖에 계셔도 가까운 당신- 이해인, ‘천리향’ 중에서- 세상의 안위와 행복은 그녀에게 있어 천리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작품 앞에서면 표현할 수 없는 향기가 전해진다. 오묘한 색과 향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국(異國)의 공원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천화백은 ‘어쩌면 내 전생은 열대어였던가, 아니면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는 야자수였을까.’ 자신의 전생을 향한 수많은 질문 속에서도 늘 복합적인 심적 구조의 충동이 일곤했다. 열대림이 무성한 보타닉 식물원을 산책하는 내내 나는 머리에 꽃을 꽂은 젊은 그녀와 함께였다. 수목(樹木)의 비릿한 내음이 진동하는 한낮, 나는 그녀의 삶에 내릴 한 줄기 스콜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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