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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분노와 용서
[신간] 분노와 용서
  • 송범석 기자
  • 승인 2018.08.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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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타임즈 송범석 기자] 분노에 대한 표출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결론이 보복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용서가 될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살해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찾아간다.

첫 번째 대응은 살해를 당한 친구를 치유하기 위해 - 실제로 죽은 친구를 치유할 수는 없기에 - 그 유가족과 함께 시간을 나누며 진심으로 위로를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유가족을 위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나에게 발생한 감정은 ‘슬픔’ 그 자체이지만, 그 슬픔을 일으킨 기제가 부당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현재 배태하고 있는 감정 자체를 분노라고 할 수는 없다. 이때 우리의 시점은 피해의 치유와 피해자에 대한 연민에 맞춰져 있다.

 

두 번째 대응은 부당함에 맞춰서 사회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더 나아가 그 부당함을 바로 잡는 것을 목적으로 외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첫 번째 대응과는 조금 다르다.

세 번째 대응은 가해자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줌으로써 피해를 보전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내가 겪은 고통 때문에, 혹은 누군가 겪은 고통에 비례해서 보복적인 열망으로 쾌감을 느끼는 단계이다. 이 과정에 있어서 ‘인과응보’라는 개념이 투영된다. 즉 우리는 가해자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앞서 벌어진 범죄행위로 인해 파괴된 균형을 회복함으로써 ‘쾌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가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는다 해도, 그로 인해 피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네 번째 대응은 피해자의 분신으로서 나를 생각한다. 즉,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 나에 대한 모욕이자 명예를 훼손당한 것이라고 확장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기도 한데, 고통과 복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결국 끼친 피해가 굴욕 또는 지위격하로 이어진다는 관념이다. 다시 말해 친구에게 끼친 피해는 나 자신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자아의 격하로 이어지며 이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보복을 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분노’와 ‘보복’에 대한 다양한 논리 양상은 그리스 철학자부터 스토아 학파를 거처 지금까지도 논의의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특히 대다수 문화권에서는 ‘인과응보’라는 점이 정의의 표상을 나타내느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죄를 지었으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기초 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탐욕의 상징인 놀부가 끝에 도깨비에게 호되게 당하는 장면이나, 탐관오리의 상징인 변사또가 장원급제를 하고 돌아온 이몽룡의 부하들에게 포박을 당하는 장면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도 다른 감정이 아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깃든 본연의 만족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과응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마틴 루터 킹의 연설에는 그런 대목이 진득하게 녹아 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 아래 앨라배마에서도, 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권 우위’니 ‘법령 실시 거부’니 하는 말들을 침처럼 뚝뚝 흘려대는 주지사가 있는 바로 그 앨라배마에서, 흑인 소년과 흑인 소녀들이 백인 소년과 백인 소녀들의 자매로서, 또한 형제로서 모두 함께 손을 맞잡으리라는 꿈입니다.”

킹의 연설에도 어느 정도의 분노는 담겨 있다. 실제로 킹조차도 처음에는 보복적인 형태의 분노가 있었다. 그러나 킹은 그 보복의 궤적을 과업과 희망의 단어로 돌려놓는 데 힘쓴다.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고 그를 깎아 내리는 일은 피해자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킹은 보복 대신 이제 화해를 외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 이런 유여한 생각과 깊은 통찰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여전히 보복은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행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노의 공화국’이다. 갖가지 혐오 표현이 난무하며, 서로를 깎아 내리고, 이념, 계층, 성별에 따른 갈등이 극에 달해 있다. 그러나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분노의 표출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저자의 직언이다. 실제로 ‘욱’하는 감정으로는 아무런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분노라는 감정을 좀 거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특히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분노 역시, 내면적인 차원에서 침착함을 이어가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전략적으로는 폭력이 추가될 수 있지만, 내심적으로는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제어했던 넬슨 만델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분노의 본질은 물론, 분노에 대해서 이어온 수천년간의 철학적 논쟁사를 살펴보면서, 과연 올바르게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고 있다. 미국의 사례가 많이 수록돼 있지만, ‘분노 공화국’을 사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 뿌리와이파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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