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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월대보름 맞아 도심속에서 즐기는 ‘다리밟기 놀이’
[서울시]정월대보름 맞아 도심속에서 즐기는 ‘다리밟기 놀이’
  • 김영창
  • 승인 2011.02.16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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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밟기’ 가능한 아름다운 돌다리 3곳 소개

정월대보름을 맞아 가족과 함께 서울 곳곳에 있는 조선시대 아름다운 다리를 밟으며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다리밟기 놀이’를 즐겨보고, 다리에 숨겨진 역사 속 이야기도 함께 새겨보자.

서울시, 정월대보름 대표 민속놀이인‘다리밟기’가능한 아름다운 돌다리 3곳 소개
서울시는 정월대보름을 맞아 도심속에서 ‘다리밟기’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돌다리 3곳을 소개한다고 밝혔다.
‘다리밟기’ 놀이는 고려때부터 행해졌던 우리민족의 생활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대표적인 정월대보름 민속놀이이며,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 일 년간 다릿병을 앓지 않고, 열두 다리를 건너면 일 년 열두 달 동안의 액을 면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풍속이다.

예전에는 광교, 수표교, 살곶이다리, 마전다리, 염천교, 뚝섬, 풍납리, 몽촌 등 여러 곳의 답교놀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승이 끊어졌고 1980년대에 몽촌, 송파, 석촌에서 답교놀이를 복원하여 <송파 다리밟기>라는 이름으로 시연을 하고 있다.서울시가 소개하는 돌다리 3곳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장 큰 규모의 다리인 ‘살곶이 다리’와 조선시대 치수정책의 증거인 ‘수표교’, 그리고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움을 가진 창덕궁의 ‘금천교’이다.

서울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살곶이 다리’: 성동구 행당동

▲ 살곶이 다리 (사적 제160호) 성동구 행당동 58 성동구 행당동, 2호선 한양대역 3번 출구 도보로 5분 거리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는 성동구 행당동 58에 있으며 화강암으로 구성된 길이 76m, 너비 6m로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다리 중 가장 긴 다리로 1967년 12월 15일에 사적 제160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강릉ㆍ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며, 수표교, 금천교와 함께 서울에서 손꼽히는 3개 교량중의 하나였다.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접어들기 직전의 사근동과 성수동을 잇고 있는 성동교 바로 위쪽에 있다.

성종 때 완공된 이 다리가 착공된 것은 세종2년(1420년) 때였으며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이궁(離宮)에 수시로 행차했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비로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했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開川)․ 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웠으며 돌난간은 없다

고종 때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 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했으며, 1920년대 서울 지방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됐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됐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또한, 살곶이다리의 살곶이는 화살이 꽂힌 곳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이는 조선 초기 태종과 태조 사이의 이야기에서 유래됐다.이후 살곶이벌 또는 전교란 지명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 태조가 그의 계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집권했으며 이에 분노한 태조는 함흥별궁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고, 태종은 태조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신하인 무학, 박순, 성석린 등을 보냈다.

그러나 보내는 신하들은 모조리 감금되거나 살해되었다. 여기에서 함흥차사 [咸興差使]라는 말이 유래되었으며 유일하게 목적을 이루고 돌아온 이가 박순이었다. 박순은 새끼 말과 어미 말을 함흥별궁 앞에 몰고 가서 어미 찾는 망아지의 애처로움 울음을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 곧 태조를 그리는 태종의 심정으로 비유하였다. 이에 마음이 누그러진 태조를 서울로 모셔올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조가 돌아온다는 전갈을 받은 태종은 하륜으로 하여금 뚝섬에 큰 차일을 치게 하는 등 손수 나가 태조를 맞는 성의를 보일 채비를 했다. 돌아온 태조는 큰 차일 안에서 서성대는 태종을 보자,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별안간 활시위를 당겨 태종을 쏘았다. 태종은 재빨리 차일 기둥을 안고 몸을 피하였고, 태조가 쏜 화살은 그 기둥에 꽂히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화살이 꽂힌 곳이란 뜻으로 살곶이벌 또는 전교란 지명이 붙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물높이를 측정했던‘수표교’: 장충단공원 입구

▲ 수표교(水標橋) 관리번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중구 장충동2가 산 197(장충단공원내) 3호선 동대입구역 6번출구
수표교(水標橋)는 현재 장충단공원 입구에 놓여 있는 돌다리로 1973년 6월 7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화강암을 짜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도 2단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했다.

화강석을 재료로 하고 있는 수표교는 현대식 다리와 같은 형식의 평교였으며 양쪽에 돌난간을 갖추고 있다. 좌우에 12개씩 24개의 난간기둥은 연꽃봉우리 모양의 조각을 갖추고 있으며 기둥 사이를 연결한 난간돌은 팔각형으로 잘 다듬어져 세련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수표교의 기둥은 2단으로 쌓아 올린 사각형의 큰 석재로서 아래 부분석(傅粉石)은 잘 다듬지 않았고 위에 올려진 기둥들은 모를 죽여 다듬었다. 그 위에 긴 휘대석을 걸치고 천판석(天板石)을 깐 진귀한 수법의 휼륭한 석교이다.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 ’라 불렸다.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됐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조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왔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서울 청계천 수표(水標)는 현재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야외 정원에 있으며 보물 제838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세종 23년(1441)에 세종은 청계천과 한강에 물높이를 잴 수 있도록 수표를 세우고, 청계천 물이 불어나면 물높이를 수시로 보고하게 했다.

한강변과 청계천 2곳에 설치하였는데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재위 1469∼1494) 때 돌기둥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폭 20㎝의 화강암 사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있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마다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했다.

세종 때 나무 수표와 비교하면 촌·푼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가뭄과 홍수를 미리 예견할 수 있어 실생활에 직접 이용된 한층 더 발전된 것이다.

한편 1960년에 청계천 복개공사 때 수표교가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1973년 10월에 현 위치에 옮겨 보존되고 있다. 이 수표의 눈금은 조선 시대의 길이를 재는 단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원래 서울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것을 1985년에 국가 지정인 보물로 변경했다. 이 수표는 세종 때 발명된 수위측정기 전통을 이은 유일하고도 귀중한 과학 문화재이다.

수표교(水標橋)는 조선의 세시풍속을 알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중 <영양세시기>에 있는 이야기에 다리밟기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정월 대보름 상원날 밤에 열두 다리를 밟으면 일년 열두 달의 액운을 없앨 수 있다고 해서 다리밟기에 나오지 않는 이가 거의 없었다. 디 다리밟기 놀이는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의 연등놀이와 함께 일년 중 가장 성대한 놀이이다. 이 두밤은 해마다 임금께서 친히 명을 내려 야금(夜禁)을 해제하였다."

또, 조선 선조 때의 시인이자 예조판서를 역임한 이안눌이 젊었을 때의 소실을 두게 된 설화 전해지고 있다.
이안눌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으로 담양부사, 경주부윤, 강화유수 등의 외직을 포함하여 형조참판·예조판서까지 지낸 고위관료이면서, 많은 시문을 남긴 문인이었다.

"이안눌이 정월 대보름날 친구들과 수표교의 다리밟기에 어울렸다가 술에 취해 다리 부근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 깨어 보니 자기 집이 아니었다. 신혼 사흘밖에 되지 않은 신랑이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자 그 집의 하인들이 수표교 부근에 만취해 쓰러진 이안눌을 이 집 신랑인 줄 알고 업고 들어와 생긴 일이었다. 이안눌의 신분을 확인한 신부는 자신을 소실로 맞아 주길 부탁했으나 아직 엄친 슬하에 과거에 오르지도 못한 주제에 두 여인과 혼인할 수 없다 하여 거절했지만 결국 신부의 간청을 못 이겨 신부를 데리고 그 집을 몰래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이안눌이 과거급제를 한 후 신부집에 연락하여 신부를 소실로 맞이하였다."이 일화에서 조선 중기에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 놀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다리‘금천교’: 창덕궁 내

▲ 창덕궁이 창건된 지 6년 뒤인 태종11년(1411) 박자청이 건축했다.창덕궁 내,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도보 5분 거리
창덕궁 금천교(昌德宮錦川橋)는 서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움의 미학을 발산하고 있는 돌다리로 유명하다.

금천교(禁川교)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궁궐내전으로 진입하는 진선문 사이에 있는 돌다리로 창덕궁이 창건된 지 6년 뒤인 태종11년(1411) 박자청이 건축했다.

금천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돌다리로 평교가 아닌 가운데를 활처럼 약간 휘어져 구릉형이며 길이는 12.9m, 폭이 15.5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다리는 세 개의 아취를 틀어 교각을 삼아 거기에 의지하여 귀틀을 설치하고 청판돌을 건너지른 매우 아담한 돌다리이다.

이 다리는 영조 이후부터 금청교(禁淸橋)로 표기되고 있으며 다리에 놓인 아취가 마치 안경과 같이 뚫린 모양을 하고 있어 안경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교각을 2개의 홍예(虹霓)로 구성하였는데 물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으며 양쪽 교대(橋臺)를 석성(石城)처럼 쌓았다. 중앙에 홍예가 모이는 곳에 큼직한 홍예 기석(基石)을 놓아 지복석(地覆石)을 삼았으며, 하마(河馬)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했다.

또한 홍예 기석상의 간석(間石)에 사자두(獅子頭)를 부조하였으며 교상(橋床) 양변에 이주석(柱石)을 놓고, 회란석(廻欄石)을 연결하는 돌난간을 만들었다. 이 다리는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보다 폭이 넓고 짜임새가 정치(精緻)하며 부재(部材)의 비율이 빈틈없이 잡혀 있어 그 구조가 퍽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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